드림 사망 합작
아이메리크 HL 드림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짚을 겨를도 없이 상황은 끝나버렸고, 아이메리크의 앞에 놓인 것은 순식간에 차가워진 시신 한 구뿐이었다. 살아 돌아오겠다고 가볍게 했던 인사는 말 그대로 가벼운 약속이 되어 공중으로 흩어지기가 오래였다. 가벼운 약속에 호의로 답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었지만, 수습할 겨를도 없이 모두 수포로 가버렸을 뿐인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메리크가 생각하는 그란디는 무뚝뚝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때에 따라선 저돌적이었다. 대담한 성격이 다수에게는 상당히 긍정적인 면모였으나 사적 관계에서는 전혀 타협이 안되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아이메리크는 고향이 이곳, 이슈가르드인 옛 영웅이 되어버린 그란디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고민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영웅이고, 또 담대한 성격을 가졌으나… 사적으로는 잘 모르겠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소개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평민은 국장(國葬)으로 치르지 말자는 여전한 귀족 세력에도 불구하고 준비되고 있는 그란디의 장례식은 그렇게 아이메리크에게 많은 짐이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에게 설득하는 것이 차라리 쉬운 일이었다. 다수의 사람이 바란다, 대의를 위해 이 정도의 호의는 보여야한다, 그는 화합을 이끈 인물이다—등의 이유는 귀족들을 설득하기에는 부족하였으나 명분 싸움에서는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역시 그에게 따르는 가장 큰 짐은 그란디에 대한 질문이었고, 아이메리크는 매 순간 대답을 하면서도 고민하고 스스로를 재는 순간을 끊임없이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흘의 준비 기간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장이 치러졌다. 사흘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죽으면 이슈가르드가 아닌 그리다니아에 묻어달라고 하였던 그란디의 말이 이렇게까지나 실감이 날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도 잠시였다. 장을 치르기 위해 주재자가 필요하다는 말을 전달받은 아이메리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머니에 넣어둔 그란디의 손수건을 어찌할까 고민하다 자리에 두고 몸만 이끈 채로 장을 치르기 위하여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향하는 동안의 아이메리크는 여러 생각이 들 법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오직, 다수의 앞에서 그란디를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에만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사흘 전. 한밤 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모두 깨어서 나가보니, 그란디가 찾아왔었다. 아이메리크는 그의 담대한 성격과 무례한 행동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였다. 영웅으로 대하여야 하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그의 행동을 어디까지 좋게 보고 나쁘게 봐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접어둔지 이틀만이었다.
“아이메리크.”
그란디는 큰 눈을 두 번 깜박이고 고개를 들고는 입꼬리에 힘까지 주어서 한번 방긋 웃는 얼굴을 보이더니 새삼 심각한 표정으로 아이메리크를 불렀다. 가볍게 찾아왔으면 무엇이라고 질책이라도 하였겠으나,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마도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왔겠지. 아이메리크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무슨 일인가? 일단 들어오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고마워. 그럼 실례 좀.”
그란디는 저를 의아하게 보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은 가볍게 미룬 채로 아이메리크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밤에는 잘 움직이지 않는 데다, 이슈가르드로 오는 것은 더 꺼려하는 그란디가 밤중에 이곳으로 온 데는 어지간히 급하거나 심각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생각을, 정작 본인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모양새였다.
“무슨 일이지?”
쏟아지는 잠을 물리치고 겨우 정신을 차린 아이메리크는 빈 찻잔을 들었다 놓았다. 그란디에게 찻잔을 보이면서 마실 것을 권할까하는 차에 그란디는 손을 내저었다.
“밤중에는 잘 안마셔서, 고맙지만 괜찮아.”
“……그럼, 무슨 일인지 들어봐도 되겠나?”
고개를 끄덕인 그란디는 아이메리크가 공들여 들여놓은 티테이블에 꾸깃꾸깃한 손수건을 하나 올려두었다.
“전에 약속했던 거 주려고 왔어.”
“약속?”
아아, 갑자기? 아이메리크는 그란디와 한, 몇 안 되는 약속을 기억해냈다. 죽기 전에 와서 무엇이든 요구하면 받아달라고 하던 황당한 약속을 잊을 리 없었다. 그는 애초에 생사의 기로에서도 몇 번이나 살아 돌아온 세기의 영웅이니까 말이다. 이슈가르드에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어린 총잡이이던 그때와 비교해보면, 그녀는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최근에는 해결해야할 문제가 없다고 들었는데….”
어깨를 으쓱하는 그란디에게서도 뭔가 심각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따금 어리광을 부리곤 한다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적은 있었으나 이상하리만치 자신에게는 그러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아이메리크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한참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어리광정도가 지금의 비상식적인 그의 행동을 해석하기에는 적당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겨우 이런 거라고 생각했지?”
손수건을 티테이블에 올려둔 그란디는 자리에 앉아 빈 찻잔을 달그락거리며 이 상황을 어색해하고, 한편으로는 달갑지 않게 여길지도 모르는 아이메리크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주 잠깐 그를 보고 있던 그란디는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왜 헷갈리게 했어?”
차라리 물은 것이라면 대답하기 쉬웠다. 확신에 찬 목소리와 말투, 그리고 작정한 태도까지 모두 아이메리크에게는 쉬운 것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알겠으나, 헷갈리게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가질 수 있는 호의와 할 수 있는 한 전력을 다해 지원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하였을 뿐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란디의 말에 찰나의 망설임을 갖고 대답을 주저할 뻔 하였으나, 아이메리크는 스스로를 이기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헷갈리게 한 적은 없는데.”
“그러면? 당장이라도 말할 수 있어?”
코 앞까지 다가와 속삭이듯 묻는 그란디에게서 그제야 옅은 와인향이 느껴졌다. 보아하니 짐작할만한 곳에서 마시다가 온 모양이었다.
“……당장 말할 것은 없군.”
“어째서?”
“너무 감정적이야, 잠시만 좀 떨어졌다가…, 말 좀 들어보지?”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하였던 그의 행보는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이메리크 역시 그란디와 마찬가지로 물음을 가장한 강요를 했다.
“그건 안되겠는데.”
그란디가 순간적으로 강하게 당긴 탓에, 아이메리크의 몸이 그란디 쪽으로 기울었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 모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입맞춤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일어난 듯하였으나, 눈 하나 전혀 깜박이지 않고 빤히 아이메리크를 응시하고 있는 그란디의 태도에서 그들의 이 상황은 충동적인 행동도 아니며, 응당 일어날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할 수 있어?”
알싸한 알콜 향이 은근하게 퍼지는 듯 하였으나 금방 익숙해졌다. 미미한 향에 이제는 그란디가 어느 정도의 와인을, 어디에서 마셨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익숙해진 만큼 아이메리크는 상황을 더는 진전시킬 생각이 없었다.
“……글쎄.”
그란디의 행동이 무엇인지는 이해하였으나, 내일이라도 당장 죽으러 가겠다는 표정으로 와서는 선전포고를 하는 그에게서 그의 상징이 되어버린 영웅이라는 말을 빼앗을 수 없었다. 아이메리크는 말과 달리 그란디를 가볍게 안아주며, 자신은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당연한 것이라고 그란디가 아닌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란디 시엘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슈가르드의 영웅으로, 그리고 이곳 성벽을 너머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모두 영웅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담대한 기질은 우리의 위치를 더욱 견고하게 할 것이며, 유연성 있는 행위는 모두를 화합의 장으로 이끄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맹우, 그란디 시엘을 위하여.”
장을 주재하기 위해 두고 온 그란디의 손수건이 여전히 자신의 방에 있기에, 아이메리크는 발걸음을 옮기며 했던 수많은 고민을 모두 모른 체 하기로 했다. 모두의 영웅으로 그를 남기고, 그의 치기어린 말과 행동은 어리광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어쩌면 오래되지 않아, 당장 이 단상을 내려가면서라도 사흘 전의 자신을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란디의 품에 가장 활짝 피어있는 흰 국화 한 송이를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