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FFXIV 드림] 합주 협주곡

POSTED ON 2020. 10. 11. 15:58

드림 언약 합작 

아이메리크 HL 드림


단 한 명이 걷기에도 조용하던 거리는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발소리와 말소리,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로 차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환한 얼굴을 하고는 푸른 하늘 아래의 잿빛 도시에 ‘영웅’이 사라졌다고 외치기도 했다. 혼자만의 소리로 소음 가득하였던 이곳은 이제 혼자만의 소리는 들을 수 없으며 들을 필요도 없는 곳이 되었다. 푸른 하늘 아래 허락받은 도시, 여러 사람의 이슈가르드를 열망하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지나가는 소리는 상층을 향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누군가를 갈망하고 열망하거나 그와 반대로 원망하는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일상의 자잘하고 소소한 소리가 이슈가르드의 곳곳을 소란스럽게는 하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위에서 위로 외치기만 하는 소리가 아니었으며, 아래에서 아래로 비관하는 소리만도 아니었다. 위에서 아래를 억압하는 소리도 아니었으며, 아래에서 위로의 불만만을 토로하는 소리도 아니었다. 어느 하나 빠짐없이 어우러져서 제법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구석구석이 잿빛인 도시에 다른 농도의 그림자를 만들었으며 더는 이상만을 바라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것만 같은 모습 사이에서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어느 한 군데라도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었다. 소란스러움이 아직은 정리되기에는 이르기도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아직 자신의 소리를 내기에 급하여 다른 사람의 소리보다 자신의 소리를 더 내고자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창천의 구석구석은 못먹는 사람과 상처를 입은 사람,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한편에서는 그런 그들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기만 하기도 하였다. 소리와 풍경이 어울리지 않는 잿빛 도시국가의 수많은 시선과 소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걷는 청발의 한 여자는 챙이 넓은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며 고개를 숙였다.

 

챙이 넓은 모자를 선호하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갈 때면 거슬렸다. 선호도와 불편함은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를 매끄럽게 피하지 못한다는 불편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발의 여자는 이슈가르드에 오는 날이면 챙이 넓고 화려한 모자를 고르고는 하였다.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기에는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오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런 모자를 쓰더라도 사람 하나 없거나, 어린 아이와 고개를 숙이고 걷는 사람들만이 있어서 불편하다고 느끼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창천거리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는 달리 말하면 화려하고 큰 모자가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모자를 어찌할까 한참 고민을 하였으나, 그렇다고 양옆으로도 넓게 퍼진 모자를 접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자를 벗을까 생각하였으나 그마저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청발의 여자는 스스로를 자의식 과잉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이것은 그런 자만심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는 그렇게 급한 대로 모자의 앞부분만 겨우 잡아서 조금 더 얼굴로 내리고 창천 거리를 걷기로 했다.

 

넓은 챙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양갈래의 땋은 머리만 보이던 그 사람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무엇인가 찾아가더니, 창천 거리의 또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은 여자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으나 제법 깔끔했다. 좁은 골목까지 사람의 손이 닿는 것인지 깨진 벽돌 사이로 처박혀있는 쓰레기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보수가 필요한 벽돌 틈 사이로는 바닥에 딱 붙어 나는 작은 풀과 꽃들이 각자의 자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회색빛의 차가운 도시에 보이는 이런 작은 유채색들이 골목을 아기자기하게 만들고 있었다. 

 

창천 거리를 지나올 때까지 넓은 챙을 고수하던 여자는 여태까지 앞으로만 늘어졌던 땋은 머리를 풀고는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제법 긴 손가락으로 빗질을 했다. 땋은 탓에 불규칙하게 곱슬해진 머리는 대충 한 빗질에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렇게 머리를 몇 번 쓸어넘기고는 다시 하나로 질끈 묶고는 작정한 듯 아까 거리를 활보할 때 불편하게만 보였던 모자를 손에 쥐었다. 모자를 쥔 손에는 무엇인가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고, 두어번 크게 쉬는 숨은 누가 봐도 그가 단단히 결심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고개를 뒤로 돌려 창천 거리를 보던 그 여자는 겨우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반쪽짜리 붉은 눈은 더 동그래졌고, 온몸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리저리 주변을 급히 살피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졌고, 앞을 향해 계속 걸었다. 가는 길 사이사이 또 다른 골목이 새끼를 치고 있었으나, 그런 것에는 이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곳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창천거리로 나와버렸기 때문이었다.

 

“……아……, 이쪽이 아니었던가?”

 

겨우 뒤를 돌아 다시 보니 아무래도 한참 지나온 것 같았다. 오랜만에 온 탓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발자국 걸으면 되었더라, 아까 그 입구에서 한 서른 발자국 정도 걸으면 되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던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구겨진 모자를 손으로 탁탁 털어냈다.

 

“어, 어!”

 

누군가 청발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고, 소란스럽던 창천 거리는 단숨에 한 곳으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모자의 주름이나 손으로 쳐내면서 펴려고 작정한 청발의 주인공은 갑작스레 조용해진 골목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아까 서른 발보다 더 걸은 것이 이 일을 만든 것 같아 괜히 민망해지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어린 아이가 걸어나왔다.

 

“어서오세요, 영웅님!”

 

영웅이 사라졌다고 외치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던, 이상적인 공간이 될 것만 같았던 창천의 거리에는 다시 우러러 볼만하며, 또 그렇게 봐야만 할 것 같은 사람의 등장으로 삽시간에 다른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마저 즐기고 있던 이가 웃으며, ‘영웅’이라고 불린 청발의 여자의 곁으로 갔다.

 

“어서오게, 잘 돌아왔다. 그란디. 기다리고 있었고.”

 

이슈가르드의 수장, 아이메리크 드 보렐의 환영 인사에 창천 거리는 짠 듯이 모두 청발의 영웅 그란디 시엘을 반겼다.

 

그 순간 영웅의 표정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가히 사색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이리저리 바쁘게 굴리던 눈과 긴장한 손,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쉽게 터지지 않는 말문까지 ‘영웅’으로 칭해지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란디는 어색하게 “어, 안녕. 총장님?”이라는 제법 오래전에나 했을 법한 인사를 건넸고, 아이메리크는 그녀의 말에 아니라고 말하며 정정하기보다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모두를 감쪽같이 속이고 이슈가르드로 오려고 했다니, 실망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닌데…….”

 

아이메리크는 답지 않게 말을 끌었고, 그란디는 그런 그의 말보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신경 쓰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를 털던 손을 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안녕”하고 인사하는 것이 어색했다.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등장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인사에, 창천 사람들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였다. 그중에서 오로지 그란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어린 소녀만이 “안녕하세요, 영웅님!”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할 뿐이었다.

 

어린 소녀는 그란디의 소맷자락을 잡고 늘어졌고, 그란디는 겨우 그 소녀를 안아들었다. 연습한 것만 같은 말투와 인사, 그리고 호칭까지 모두 그란디를 의심하게 하였으나 자잘하게 무엇인가를 묻는 성격이 아닌 탓에 그저 눈을 맞춰 웃고는 소녀를 내려주었다.

 

“나중에 또 뵈어요, 영웅님!”

 

꼬박꼬박 ‘영웅님’이라고 붙이는 것이 어색해, 그란디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렇게 대단한 유명인사가 되어 주변에 인사를 하고 다시 빠져나왔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어느쪽으로 가든간에 이 길이 나을 것 같아보였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는 거지? 오자마자 창천거리로 돌아오다니, 영웅답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란디의 의심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의심을 눈치챘으나 전혀 티를 안내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그란디는 아이메리크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다시 앞으로 걸으며 대답했다.

 

“우리집, 아니 내 집으로.”

“지나오면서 들렀다고 생각했다만, 아닌 모양이군.”

“그게 서른 걸음만 걸어야하는데 내가 서른두 걸음을 걸어버려서 애석하게도 놓쳤지 뭐야, 총장님. 아니, 이제 총장이 아니지? 어쨌든.”

 

그란디는 말하다가 문장 끝에 누군가의 호칭이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자신의 습관임을 문득 깨달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아이메리크와 더 이야기를 했다가는 주변의 시선에서 자칫하면 놓여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애초에 공공의 화제거리가 되고싶지는 않았다.

 

“굳이 좁은 골목으로 다니지 않아도, 그란디 그대가 다닐만한 길이 이 창천가에 있는데 말이지.”

“고맙게도 너무 큰 거리라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럼 이만…… 가도 될까?”

 

평소같으면 가겠다고 모자라도 내던질 성격이었으나, 여러 사람 앞에서 그러는 것은 그란디 그에게도 아이메리크에게도 그닥 적절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래서 겨우 물은 것인데, 아이메리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로는 거절했다.

 

“그건 좀 아쉬운데, 이따 차라도 한 잔 할까?”

 

은근한 협박이라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란디는 고개를 숙이며 알겠다고 했다. 깨끗하게 정리된 창천 거리의 한 골목은 그렇게 그란디가 주장하는 서른두 걸음의 좁고 짧은 거리가 되었다.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는 귀족 엘레젠과 영웅 휴런의 모습. 누군가 보기에는 자극적이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호기심을 이끌만한 그림이기도 했다. 거기에 깊게 눌러쓸 수 있었던 챙이 넓은 모자까지 손에 쥐여지면서 모두가 두 사람을 볼 수 있던 탓에, 소문이 빠른 이슈가르드에는 그란디의 이슈가르드 귀환이 제법의 화제가 되었다.

 

“그렇게 몰래 집으로 갈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내가 아는 영웅의 집은 그리다니아(*주: 에오르제아 동맹의 또 다른 도시국가)에 있지 이곳에는 없어서 착각을 한 모양이야.”

“그런 사람이 아이까지 동원해서 인사시킨 건 너무 노골적이었어, 아이메리크.”

 

그란디는 아이메리크를 쳐다보지도 않고 구겨진 모자의 주름을 보면서 대답하였다.

 

“조만간 있을 발표를 위해서는 이 정도 이벤트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준비한 거였는데,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이건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래, 이벤트네. 총장님에게는 쁘띠 파티, 나에게는 사건 사고.”

 

멀쩡한 표정으로 아이메리크를 응시하며 그란디가 한 말은, 그가 잘 하지 않았던 제법 의미있는 농담이었다. 말에 뼈가 있다며 그란디에게 한 수 놓은 아이메리크는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신전기사단의 총장실 문을 열었다.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서는 여전히 집무를 볼 것 같던 공간에 짐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매캐한 먼지 냄새만 났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여전히 변함없는 것은 없었다. 굳이 꼽아보자면 기사단 건물을 둘러싼 회색의 벽돌들과 그란디가 평소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이슈가르드의 자주빛 장식들이 전부였다. 그런 곳에 놓여진 테이블과 의자를 본 그란디는 손으로 대충 의자의 먼지를 털고는 앉았다. 손에 엉겨붙은 먼지도 손으로 대강 털어냈다.

 

“오랜만이야.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좀 이상하게 인사를 해버렸지만.”

“잘 다녀왔나보지?”

“에스티니앙이 전했나보네.”

“직접 와서 전하지 않은 것이 유감이었네만, 잘 지낸 것 같군.”

“잠깐 만난거야. 돌의 집에서.”

 

주도권이라고는 누구에게 있는지 모를 이상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그란디는 아까 아이메리크가 말했던 일종의 ‘이벤트’에 대한 말을 회피하고자 하고 있었다.

 

“아까 했던 말을 계속 하자면 말이지.”

“자, 잠깐만. 나 이제 앉았거든?”

“그런데? 무엇이 문제지? 앉았고, 나는 보다시피 이렇게 서서 부탁을 하고 있네만.”

“막 돌아온 사람에게 할 부탁은 아니지 않아?”

“막 돌아온 영웅에게, 내가 무슨 부탁을 하려고 하는지 영웅은 아는 눈치인데. …말을 하지 않아도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건가?”

“그게 아니잖아!”

 

절대로 손해보는 것은 싫다는 그란디의 삶의 모토는 이렇게 허술하게 무너지곤 하였다. 이후 아이메리크가 멈춰 서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란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괜히 옷에 붙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게, 쁘띠 파티랑 사건 사고는 같이 올 수가 없는데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벤트를 그렇게 고차원적으로 나눠서 생각한다고 비꼬면서 대답할 생각은 죽어도 말지? 일단 감정적인 문제였다고, 나는.”

 

여행을 권하던 영웅은 어느새 죽음을 작정한 채로 무모한 도전을 해왔고, 겨우 돌아왔다. 그리고 그 영웅은 마지막 순간에 ‘만약 이번에도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땐 어떤 이벤트이든 한번 즐겨나 보자’고 말하던 이였다. 그때의 그란디는 물론 진심이었으나, 이렇게 모두의 관심 속에서 하는 이벤트는 그에게 있어서 파티보다는 사건과 사고에 가까웠다. 이런 것을 차근차근 설명할 재량은 없었기에, 그녀는 아이메리크가 하나씩 물어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의 주체는 그란디 자신에게, 질문의 주체는 언제나 그랬듯 아이메리크에게 주고 있었다.

 

“그전에 말인데, 이제 그 ‘영웅’은 그만하면 안돼? 너무 부담스러워졌어. 여기 말고 저쪽에서도 불리는데, 별명이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야. 별명은 좀… 내 스타일은 아니기도 하고.”

 

그란디는 여지껏 창천 거리에서 불렸던 자신의 호칭이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아이메리크는 그런 그녀에게 굳이 ‘안된다’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돌아온 건가?” 아이메리크의 물음에 그란디는 “모르겠어.”라는 유보적인 대답을 했다.

“어디로 갈 거지?” 또다시 이어진 아이메리크의 질문에 “그것도 모르겠어.”라고 답했다.

“누군가와 같이 갈 건가?” 생각하지 못했던 세 번째 질문에, 그란디는 잠시 고민하더니 “같이 갈래?”라고 물었다.

“에이, 바쁘지?”

 

지난날, 아이메리크가 언젠가 함께 하는 여행도 생각해보겠다고 하였으나 그 모든 것은 이슈가르드에서 떠날 수 있을 때였다. 그란디는 괜히 한마디 던진 것 같다며 말을 거뒀다.

 

“내가 괜한 말을 했네. 모르겠어, 아마 누군가 가야한다면 같이 가겠지?”

“그렇다면 이번에도 또 무언가를 주고 갈 생각인가?”

“그것도 생각 중. 주고 갈지, 가지고 갈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

 

언제나 자신의 주체는 오로지 자신이라며, 사명감이라는 것에서 스스로를 구하기에 바쁘기만 하였던 그란디는 어울리지 않게 애매한 답을 내놓고 있었다.

 

“어떤 방법을 택할 건지 물어봐도 될까?”

“오늘 이벤트의 결과에 달리지 않았겠어? 의장님 하나 데리고 가도 문제 없는 곳이라면, 아마 같이 가겠지? 반대로 나보고 죽어도 용납 못한다고 하면, 나는 여기에서 나가고 너는 여기에 남고. 말 그대로 사고겠고.”

“모두 그대와의 일이 파티라고 생각할 거야.”

“아닐 수도 있어.”

“나와 약속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그런 건가?”

 

아이메리크의 이따금의 직설적인 말은 그란디를 충동질하기에 적합하였다. 평소같으면 곧잘 대답하던 그란디는 잠깐의 고민 끝에 그에게 늘 그렇듯, 편하게 대답하였다.

 

“아니. 그냥, 어색해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나니까 우리가 이렇게 되어있는 게 어색해서 그랬어. 문제없고, 하자. 그 대단한 이벤트.”

 

합의된 사고라면 합의된 것이기는 하였다. 그란디는 먼지 가득한 총장실에서 나와 기사단의 문을 나섰다. 평소 지독히 눈만 내리던 이곳, 이슈가르드의 중앙에서 영웅의 힘을 빌린다며 연설을 부탁하던 아이메리크가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조금은 도구에서 벗어난건가? 그란디는 여전히 알지 못할 그의 속내에 헷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벤트’를 그란디의 표현대로 ‘쁘띠 파티’정도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아주 대단한 도구로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여하튼 시끄러운 창천의 거리에 언제나 내리던 눈은 내리지 않고 있다.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움직임에 그나마 내리던 눈도 녹고 있었다. 고운 은색과 거친 회색빛이 부자연스럽게 어울리던 이슈가르드는 이제 푸른 하늘 아래 균일한 은빛의 도시로 거듭날 것만 같았다. 아직 낙관적인지 모르겠으나, 이것도 여러 사고를 겪다보면 언젠가 정리가 되겠지 싶었다.

별 것 아닌, 살아 돌아오면 함께 하겠노라 약속했던 지난날의 상투적인 약속이 앞으로의 발표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메리크의 인사와 그란디의 소개, 그리고 그들의 약속이 축복받을만한 것으로 발표되던 이 날의 이슈가르드에는 어느 하나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없다. ― 영웅이 사라졌다고 외치던 이들은, 더는 위의 세상만을 동경하며 바라보지 않았다. 독주를 하던 영웅은 그의 연주를 그쳤고, 독주를 즐기던 이들은 각각의 독주의 주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