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2019/2018

[세나나루] 어쩌다 여름이 되었다.

POSTED ON 2018. 4. 8. 13:25

잘 다녀와.

짧은 말로 긴 시간을 대신하며 인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시간이 얼마나 길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다녀오라는 가벼운 인사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여름이 되었다.

세나 이즈미 × 나루카미 아라시

 

 

짓궂은 날씨는 변덕도 어지간히 부렸어야 했다. 세나 이즈미는 해외 촬영까지 하러 와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의 주변은 온통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오가는 말뿐이었고, 그나마 바람마저도 그를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짜증 난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삼켰다. 삼켜버리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를 들어보자면 역시 그 짧은 말로는 전부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컸다.

짧고 불친절한 말은 기분 나쁘게 하는 이 날씨에 딱 어울렸다. 매사에 그런 말을 내뱉었기 때문에 이런 날에는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게 말해 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짧고 불친절한 말이 거슬리는 늦봄이었다.

 

* * *

 

이즈미는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태로 촬영을 끝냈다. 아직 여름이 되지 않은, 적당히 기분 날씨의 오늘은 늦봄이었다. 벽에 걸린 달력에 빨간 색연필로 엑스(X)를 하루하루 그리며 날짜를 세어보던 아라시가 생각이 났다.

해외로케.”

언젠데?”

표시해 뒀는데? 그 달력에.”

그 날부터 하루씩 지워가며 꼭 이즈미의 긴 외출을 기다리는 것 같던 아라시의 행동이 사실은 서운했다. 그게 단순한 가시성 취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라시는 그런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을 정도로 제법 안정이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어쩌면 이즈미 자신과 오랜 시간 동안의 안정적인 관계가 내어 준 결과 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서운하게 할만한 행동이었다. 그는 그렇게 여전히 서운했다. 봄이 되면 아라시에게 봄을 타는 거냐고 넌지시 물어보곤 했던 말을 이제는 저에게 해주어야만 할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유쾌하지 않은 촬영이 되었고, 그것은 자신을 더 유쾌하게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지지부진한 촬영으로 인해 이즈미의 일정은 하루 이틀 늘어졌고, 정말 재수 없게도그가 마음을 잡고 촬영할 만하면 비가 오기도 했다.

가지가지 하네.”

짧게 말하는 것이 싫어서 말을 아꼈던 이즈미가 며칠 만에 꺼낸 말이었다. 제 말을 듣고 마음 상할 사람이 더러 있었겠지만, 이즈미는 제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 것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인간은 감각의 동물이잖니? 이즈미쨩이랑 나는 다 감정뿐이야. 서로 이해하는 건 그만두자? 그냥 이대로가 좋잖아.”

라고 말하며 밤마다 지친 저의 옆에 와서 누워 토닥여주던 아라시의 말이 갑자기 생각날 정도였다. 딱히 자신을 이성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매 순간 저의 감정에 나름의 명분을 이유로 세우고 있었기에 그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랬던 말이 이렇게 문득 생각이 나다 못해, 이제는 이해까지 할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별다른 이유가 없었음에도 지난 며칠 사이에 이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 이것을 한심한 생각으로 치부하고 말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뿐이었다.

계속 머리에서 빙 돌며 시끄럽게 굴던 말을 잠재우고자 이즈미는 눈을 감았다. 늦봄은 좋을 것 하나 없이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 * *

 

나루카미 아라시는 세나 이즈미가 싹 비운 옷장을 열어두고 앞에 삼십 분째 서 있다. 그러고는 옷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손을 넣어 한 번 훑어보았다. 남은 것은 정말 공기뿐이다. 아라시는 텅 빈 옷장을 보고는 웃었다. 소리가 나지도 않았고, 특별한 감정이 더해지지도 않은 웃음이었다.

그거 대외적 웃음?”

이즈미가 늘 그 말을 하며 지적하곤 했던, 딱 그 정도의 웃음뿐이었다. 아라시는 오른손을 들어 손등과 손바닥을 뒤집어보더니 옷장에 붙어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검지와 엄지로 입꼬리를 잡아 올려보았다.

그때 조금만 더 이렇게 웃으면서 인사해줄 걸 그랬나?”

아라시는 이즈미한테 했던 그 짧은 말 잘 다녀와 이 마음에 걸렸다. 이즈미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저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촬영 지연이라는 말과 새로운 일정표, 그리고 언제일지 확신할 수 없는 이즈미의 귀국날짜였다.

, 이즈미쨩. 힘 좀 내. 이러면 내가 어떻게 힘이 나겠니?”

아라시는 전신 거울에서 눈을 떼고 옷장을 닫았다. 옷장은 텅 비어서 큰소리가 이즈미의 빈자리를 대신했다. 창밖에서는 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제법 거셌지만, 아라시는 듣지 못했다. 그는 들을 정신도 없이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오른쪽으로 돌아누워도 왼쪽으로 돌아누워도 달라질 것 없는 모습에 아라시는 천장을 보고 누웠다.

정말, 이즈미쨩 너무 짜증 나게 굴잖아!”

짧게 말할 줄 모르는 그는 길게 풀어 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해주었다.

 

* * *

 

이즈미는 그다음 날 촬영도 하지 못했다. 건기와 우기가 딱히 나누어진 곳이 아니었음에도 이상하게 비만 며칠째 내리고 있었다.

이러다간 정말 큰 일 나겠어요.”

?”

정해진 날짜에 촬영은 무슨, 비행기가 뜨겠어요?”

지구를 구하자! 라는 사명감이 투철한 평범한 사람의 대화가 일방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즈미는 그런 사명감은 제발 혼자서 가지고 있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려고 입을 떼면 어디선가에서 그의 불친절함에 혀를 내두르며 나타나는 이가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나타날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즈미는 눈을 감고 끝내,

그런 사명감은 제발 혼자서 가지고 있지?”

라고 말했다. 적어도 웃기네.”보다는 조금 길어졌다.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세요?”라는 공감 범위가 유난히도 넓은 사람의 말에 이즈미는 피곤해 눈을 더 꼭 감았다. 그러고 앞을 보고 있으니 아득해지며 주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웅웅 거리는 소리는 꼭 큰 비가 지나가고 나서 오는 잠깐의 평화 같았다. 날이 갰다고 좋아하는 그 잠깐의 시간 정도라고 하면 될 정도의 것 말이다. 큰비가 무서운 결과를 가지고 올지도 모른다는 것은 잠깐 잊을 수 있는, 그 몇 초간의 안도감과도 같았다.

오늘 밤엔 비가 그친다고 하네요! 다섯 시부터 촬영 준비합시다!”

감독의 말소리가 이즈미의 잠시간 고립을 깨버렸다.

 

* * *

 

이즈미가 없는 동안, 아라시의 생활은 비교적 자유분방해졌다. 아라시는 까다로운 그의 입에 맞는 생수를 사서 냉장고에 채워두는 일도 하지 않았고, 옷장을 열어 이즈미가 무슨 옷을 입고 갔는지 내내 생각하다가 걱정하는 일도 없었다. 그 많은 짐을 홧김에 들고 나갔으니 꽤 무거웠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깐의 걱정이 들었다가도, 변덕스러운 봄 날씨처럼 곧 그 생각도 그쳤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창문을 자꾸 건드렸다. 잔상처가 잔뜩 난 창문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지 않아 블라인드를 설치했다. 소파에 올려두었던 쿠션을 바꾸었고, 침실의 이불도 갈았다. 아라시는 이즈미의 흔적이 난 것을 모조리 세탁실 앞에 내던지듯 뭉쳐 두었다.

돌아오면 정말 크게 혼내 줄 테니까. 그는 그렇게 다짐에 다짐하며 하나씩 치워버렸다. 그렇게 쌓인 것이 세탁실에 한가득하였다.

정말, 있으나 없으나 속 썩이는 건 똑같네!”

아라시는 이즈미가 늘 소파에서 곁에 두고 있던 쿠션을 발로 툭툭 쳤다. 당사자가 보았다면 뭐 하는 거냐고 하며 시끄러워야만 했지만, 집 안은 고요했다.

나도 우리 집이나 갈까…….”

아라시는 꼭 누가 있는 것처럼 말을 하고는 불을 다 끄고 세탁실을 나왔다. 그러고는 방으로 가서 제 짐을 모두 싸서 나왔다. 약 오 년 정도 했던 동거의 짧은 휴전이라고 생각했다.

 

* * *

 

도착 오전 열 시. 확정.

이즈미는 짧은 문자를 남겼다. 아라시가 볼지 안 볼지 모르니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아라시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문자를 남겼다. 아라시는 요즘 같은 세상에 문자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열 몇 가지의 이유를 늘어놓았었는데,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바로 답장이 왔다.

내 집인데?

? 며칠 만이었다. 이즈미는 진심으로 짜증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간만에 신경 쓴 탓인지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눈을 감고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어째서?”

이즈미는 답장하며 그것을 그대로 읽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말하고 나서 치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받는 사람은 모를 일이니까. 이즈미는 그 짧고 불친절한 인사에서 오던 서운함은 잠시 눌러두고, 저의 평소 말 습관 그대로 늘어놓았다.

어째서? 말도 없이 그냥 집으로 가기로 약속했던가? 나는 집이 아니라 일로 나와 있는 건데. 그렇게 난데없이 가버리면 어쩌자는 건데?

흥분해서 할 말을 고스란히 써서 보내고 나서야 이즈미는 새삼 느꼈다. 짧고 불친절했던 제 말을 아라시가 고스란히 따라 했을지도 몰랐겠다는 것을 말이다.

 

* * *

 

도착 오전 열 시. 확정.

내 집인데?

어째서? 말도 없이 그냥 집으로 가기로 약속했던가? 나는 집이 아니라 일로 나와 있는 건데. 그렇게 난데없이 가버리면 어쩌자는 건데?

아라시가 이즈미에게 받은 문자는 꽤 길고 상냥했다. 이즈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상냥함의 기준이란 조금 이상했지만, 그들끼리는 이해할 수 있는 선이었다.

잠깐 뭐 찾으러 온 거야. 이즈미쨩, 화났니?

아라시는 그렇게 익숙한 집의 문을 열었다. 익숙한 향이 이제 거의 없어졌다. 새 시트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향과 거실에 둔, 효과가 미미할 것만 같았던 디퓨저 향만이 집을 채우고 있었다. 아라시는 이즈미한테 말했던 것과 달리 그들의 집으로 익숙하게 들어갔다.

그 뒤로 문자가 더 왔다. 하지만 아라시는 핸드폰을 뒤집어두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는 새 시트로 바꾸어 둔 침대에 이즈미의 향이 미미하게 남아있는 이불이며 베개를 한 아름 안아 들고는 다시 침실로 향했다.

차암, 길게 끌며 아라시는 이불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세탁실에서 먼지가 제법 쌓였던 터라 방 안은 먼지로 가득해졌다. 기침 몇 번에 나름의 재회의 신고식을 치른 아라시는 침대에 누웠다. 오전 열 시까지 공항으로 갈 시간을 계산하고는 알람을 맞췄다.

사실 듣지 않아도 충분히 준비해서 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가는 것까지 하는 것은 어쩐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아라시는 그렇게 이즈미가 벴던 베개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다시 먼지가 일고 몇 번의 기침을 하며 이즈미의 흔적과 만났다.

늘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면 있던 이즈미의 자리에, 꿉꿉하고 메케한 먼지 냄새가 섞인 이불을 두고 저의 이불을 덮었다. 활개를 치며 잘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라시는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조금이나마 이즈미의 향이 남아있는 이불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 * *

 

날씨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그냥 보냈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즐기지 못한 것이 괘씸하다며 더위를 몰고 왔다. 며칠 사이에 갑자기 여름이 되어버려, 아라시는 급히 옷장에서 여름옷 몇 개를 꺼내 입고 공항으로 향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여름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