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상블 스타즈! 꽃말 합작 참가작 입니다.
* 이즈미 중심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받는 이에 제 이름이 적혀있었음에도 믿지 못했다. 세나 이즈미는 편지를 뜯지 않고 봉투만 찬찬히 훑어보았다. ‘발신인 : 나루카미 아라시’라는 글자 옆에 익숙한 필체로 보이는 ‘사망’이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거슬렸다. 낯설지 않은 필체. 이즈미는 그 필체의 주인공을 찾아가기를 마음먹었다.
안녕, 잠시만.
필체 사전 조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알고 나면 아라시가 편지를 보낸 곳에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 이즈미는 아라시가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멋대로 상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그렇게 편지에 적힌 낯선 주소를 향해 기차를 탔다. 그가 정말로 죽었을 리는 없고, 대체 왜 이런 심술을 부리는지 가늠이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좋아서 죽지도 못했던 저의 연인을 곁에서 떼어두고 받은 첫 편지가 겨우 사망이라는 단어나 거론하는 것이라니. 그는 이 편지의 존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깐만 헤어져있자, 시간이 필요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저 할 말은 다 했다는 것만 같은 마침표가 유독 눈에 거슬렸다. 그의 말에 순순히 응해준 보답이 이렇게 돌아온 것에 입이 썼다. 보답보다는 대가에 가깝지 않느냐고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었다. 이즈미는 주변에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만 말하고는 짐을 챙겨 그대로 기차에 올랐다. 아라시가 보낸 편지의 주소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이 방법 말고는 없었다. 여러 가지로 짜증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즈미는 저를 따라붙을 사람이 신경 쓰여 기차표를 예매하는 동안에도 필담을 애용했다. 「후쿠오카 행」이라고 적은 종이를 내밀어 표를 구하고 자리에 앉았다. 평소 같으면 이런 변장 아닌 변장은 질색했을 텐데, 이상하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 그리고 그는 기차에 올라 한참 생각해보고 나서야 아라시가 자신을 보고 도망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렇게 변장했다는 우스운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 * *
기차에 올라타고 나서 꽤 오랫동안은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었다. 이렇게 장시간 기차를 탄 것은 오랜만이었기에 발끝부터 치밀어 올라오는 멀미 기운을 누르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겨우 물 세 병을 마시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짜증나기만 했다.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기어이 자신을 불러내는 것이 황당했다. 더군다나 그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비행기는 교통이 더 불편했고, 차를 운전해서 가기에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아라시의 심술은 언제나 받았지만, 이렇게까지 집요하기는 또 얼마만인지 몰랐다. 이즈미는 아라시의 마지막 심술이 언제인가 생각을 하다가 그마저도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라시를 이해해주기로 했다.
“오랜만의 심술은 여기까지라고.”
이즈미는 테이블을 당겨 내렸다. 기차란 이렇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교통수단이라고 투덜거리며 아라시에게서 온 편지를 가장 먼저 간이 선반에 올려두었다. 그러고 나서야 반 년 뒤에 다시 있을 Knights의 활동을 위해 악보를 펼쳤다.
* * *
“우리끼리만 활동하자고?”
레오가 아라시가 없는 Knights의 멤버들에게 악보 세 장을 내밀었다.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뭐라고 덧붙여서 말했다. 하지만 이즈미는 그런 말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손에 들린 악보와 곁에 없는 사람. 그 사이에서 어느 쪽을 편들어야 하나 고민하는 데 제 사정이 급할 뿐이었다.
“세나, 나루가 없어서 별로인걸까! 나루야 구하러 가면 되는 거잖아? 사라진 뮤즈를 찾아서!”
어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기에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동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라시의 이야기를 할 때면 유독 더 그랬다. 끝을 끌며 이즈미의 눈치를 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즈미는 레오에게 답을 하면서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받은 악보를 들어 괜히 츠카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답했다.
“올 거였으면 진작 왔겠지.”
아라시가 Knights의 앞에서, 그리고 이즈미의 앞에서 인사를 건네고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2년 만의 이야기였다.
* * *
덜컹거리며 정차한 탓에 잠깐 졸던 것마저도 날아가 버렸다. 이즈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마른세수 해가며 겨우 다잡고는 창밖을 보았다. 벌써 주변은 조용해졌고, 간간히 창 너머 큰 길 너머로 야경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것들이 보이는 게 전부였다.
이름도 잘 들어보지 못했던 역에 내렸다. 괜히 어깨를 한 번 털어내고는 말았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평소 같았으면 먼저 팔짱을 끼고 와서 귀찮게 물어왔을 말에, 그는 “어차피 마음대로 할 거잖아.”라는 말만 해왔다. 그리고 옆에 사람이 없음에도, 그는 여전히 생각나는 말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어쨌든 이즈미는 간이역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곳에 내려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택시가 보였다. 영업한다는 표는 잔뜩 내두고는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을 깨우기로 했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즈미는 그렇게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사과를 마음속으로 하고는 택시에 올랐다.
“가장 가까운 호텔이요.”
아라시의 흔적을 찾으러 나선 이후로 그가 처음 한 말이었다.
* * *
택시 기사는 이즈미에게 꽤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흘끗 어깨 너머로 이즈미를 보고는 물었다. 왜 이 역에서 내렸어요? 그의 질문은 정말 단순한 궁금증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즈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누가 이 코스를 추천해서요.”라고 간단하게 말했다. 사실이었다. 편지에는 꼭 이 코스를 따라 와야만 만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은 도통 알 리 없는 기사는 이즈미의 답을 듣고 웃었다. 이즈미는 그가 왜 웃는지 궁금했다. 창에 비치는 제 모습을 괜히 한 번 보았다. 그렇게 행색이 웃긴가? 평소 같았다면 물었겠지만, 검은 양복을 입고 점잖다 못해 침울하게 앉아있는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즈미는 고민 끝에 묻기로 했다. 기사에게 꽤 집요한 표정과 어투를 하고는 물었다. 하지만 택시 기사는 답을 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래서 이즈미도 창문 밖과 맞지도 않는 시간을 잘도 알려주는 택시 안의 시계를 번갈아 보며 시간을 죽일 뿐이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꽤 번화가에 위치한 새 역사에 도착해서야 택시가 멈춰 섰다. 이즈미는 멍하니 밖을 보았다. 기사가 왜 웃었는지 그제야 알아챘다. 그는 나직하게 나오는 욕을 그만 둘 생각도 없었다. 꽤 길게 하고 나서 그는 기사에게 인사를 전하고 내렸다. 역사에서 조금 걸으니 아라시가 편지를 보낸 곳이 보였다.
이즈미는 나루카미 아라시라는 이름을 대고 한 호텔로 들어갔다. 호화스럽기 짝이 없다 못해 사치스럽기까지 했다. 대체 이런 데서 뭘 하겠다고? 그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짝다리를 짚고는 발을 한 시도 가만 두지 못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는 원하는 층에서 멈췄고, 이즈미는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두꺼운 문 너머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즈미는 예의상 다시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조금 소란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아라시에게는 딱 어울렸다. 누군지 몰라도 아라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에게 이 종이 쪼가리를 보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어쨌든, 이즈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긴 통로는 그동안 아라시의 생활이 얼마나 텅 빈 것과 같은가 여실히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긴 통로를 따라서는 온갖 것이 엉켜있었다. 옷이며 신발, 이즈미가 몇 차례 사주었던 구두며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솜 쪼가리들 ― 이즈미는 아라시의 품에서 도무지 뺏을 수 없는 인형을 ‘솜 쪼가리’라고 표현하곤 했다. ― 도 널브러져있었다. 그것을 치우자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개꽃 한 무더기가 바스러져 바닥을 어지럽혔다. 이즈미는 발로 쓸어 그 조각을 한쪽으로 밀어내며, 허리를 숙여 그것을 잘 정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가끔 사이즈가 다른 신발이며 옷이 눈에 걸리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소리의 실체에 닿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수십 미터는 되는 것 같은 긴 복도를 지나 걸었다. 아라시는 꼭 무엇인가 대단한 발표라도 할 것 같은 사람처럼 장식을 달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누가 그에게 장식으로 조언하고 있었다.
이즈미는 아라시를 부르려 했다. 이름으로 부를까, 아니면 성으로 부를까,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말로 부를까. 이즈미는 내내 그것을 생각하고 어떻게 부를지 직접 연습까지 했지만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아라시가 뒤를 돌자, 이즈미도 뒤를 돌아 걸었다.
“세나!”
이즈미를 붙잡은 소리는 아라시의 것이 아니었다.
* * *
이즈미의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아라시를 꼭 닮은 탁한 금발의 외국인과 레오였다. (이즈미는 레오의 곁에서 웃는 그 정체 모를 외국인의 모습이 아라시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일본어에 제법 능한 그는 자신을 무어라 소개했지만, 역시 이즈미는 별로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세나! 정신을 차리고 들어야지!”
“하? 지금 성의를 요구하는 거?”
그는 짜증스럽게 다리를 꼬고 자세를 바로 잡고는 레오를 흘겨보았다. 어디서 저런 사람을 구한 건지. 아라시와 정말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이즈미는 자연스럽게 아라시의 빈자리를 그에게 대입하고 있었다.
“세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싶었달까! 와하하―”
어색하게 끄는 웃음소리는 곧 정적을 가져왔다. 이 화려한 곳에서의 적막함은 레오와 이즈미 모두에게 꽤 무겁게 다가간 듯 했다.
“요지는? 여기에 부른 이유, 있을 거 아니야. 이 글씨. 왕님이 쓴 거지?”
이즈미는 저에게 왔던 사망 통지서와 다름 없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레오는 꼭 아라시와 이즈미가 서로를 보고 하던 그대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도 아라시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왜 부른 건데? 여기에 있었으면, 애초에 왕님이 그냥 잘 놀고 오면 되는 거였잖아. 작업은 끝난 거? 할 일은? 또 쓸 데 없이 도망다녀서 괜히 우리를 피곤하게나 하지 말고…….”
말이 길어졌다. 이즈미도 제 말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 입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말을 하고 있으면, 두 사람은 꼭 저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눈으로 계속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왜 자꾸 말이 이렇게 돌아오게 하는 건데. 왜 부른 거?”
“내 새로운 뮤즈! 나루의 빈자리를 대신해줄 사람이야. 소개! 와하하하! 소개랄까? 세나에게도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이지 않을까 해서?”
“그러니까 왜 여기에서 저 사람을 나한테 소개하는 건데?”
이즈미는 쉼호흡을 크게 해 숨을 정리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아라시의 흔적이 다분한 이곳에서 아라시를 대신할 사람을 소개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 부탁이라고 해서?”
“누구의? 왕님의? 됐어. 그런 거라면 저 사람에게 부탁해도 될…….”
“세나!”
나루의 부탁이지! 하는 소리에 힘이 빠졌다. 이즈미는 아라시 없이는 어떤 영감도 들지 않아 싫다는 레오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슬리퍼도 신지 않고 들어온 탓에 양말에는 바스러진 안개꽃만이 엉켜 있었다. 이즈미는 그대로 겨우 정신을 붙들고 자리를 나왔다.
* * *
이즈미는 다시 돌아왔다. 아라시를 찾았냐는 말에 그는 그냥 웃기만 했다. “돌아올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 그 말만 할 수 있었다. 아라시의 사망 선고는 뮤즈를 잃었다는 레오의 단순 해프닝으로 끝이 났지만 이즈미에게 더 나아진 것은 전혀 없었다.
레오는 아라시를 닮은 그 사람을 곁에 두고 꼭 이즈미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집요하게 굴었고, 이즈미는 그런 그 두 사람을 피하는 데 급했다. 그렇게 몇 달이 더 지났다. 그 사망 선고서와 다름없던 종이의 주인공이었던 아라시는 바스라져, 이즈미에게 겨우 엉켜있던 것과 같은 꽃을 안아들고 이즈미의 앞에 나타났다.
“미안했어.”
아라시의 가벼운 사과에 이즈미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앞에 나타나서 레오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아라시였다. 그의 영감의 전부가 된 것을 더는 부담스러워하지 않아하는 눈치였다. 그는 이제 볼 것도 없이 맥이 빠진 이즈미의 앞에 서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얀 안개꽃 더미를 앞에 내밀 뿐이었다. 이즈미는 아라시의 작은 행동에도 몰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해 눈을 감았다. 볼 것도 없는 겨울, 피로를 안고 온 작은 꽃은 예쁘게도 말라있었다.